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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작성자 africaim
제목 D80-13일 가나로
작성일자 2016-08-28
조회수 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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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80-13일 가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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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찍 서둘러야 아크라까지 갈 수 있습니다.”

내가 아침식사를 하면서 채근하자 문형과 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문형이 다시 물었다.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고 자동차로 가야할 이유가 있나? 아비장에서 아크라까지 비행기편으로는 1시간밖에 걸리지 않고, 도로사정도 좋지 않은데다 치안도 불안하다면서.”

잘 알다시피 비행기로 간다 하더라도 공항까지 반 시간 걸리고 비행기 출발 2시간 전까지 공항에 나가 수속을 밟아야 하는 데 2시간 반이면 버스가 가나 국경까지 갈 수 있다고. 그 보다 더 중요한 건 가나에 가면 볼 곳이 몇 군데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엘미나(Elmina) 성이야. 그런데 엘미나 성은 아크라에 가기 훨씬 전에 있거든. 예를 들자면 서울에서 제주도 가는 도중에 해남 땅끝이 있는 격이지. 그러니까 구태여 아크라까지 갔다고 되돌아올 필요가 없다는 거야.”

나의 말에 한형이 자동차로 가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거고, 육로로 가야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고 나를 거들었다. 그러자 문형이 이번 여행에서는 불어권 나라들을 돌자고 했으면서 왜 영어권인 가나를 가려 하느냐고 여전히 시비를 걸었다.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문형 말도 맞아. 헌데 아프리카에서 면적, 기후, 인구 등 비슷한 조건을 갖춘 두 나라를 비교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어? 게다가 식민지배를 했던 나라가 프랑스와 영국이었고, 독립 직후에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사회주의라는 각각 다른 노선을 취했고, 한 나라는 장기집권 다른 한 나라는 여러 차례의 정변이 일어났으니까 경제발전에 미친 영향 같은 것을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고.”

기어이 육로로 가나를 들어가겠다는 데 더 할 말이 없네. 얼른 짐을 챙기고 떠나자고.” 문형이 고집을 꺾자 우리는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신속히 하고 택시로 국경까지 가는 버스가 있는 곳으로 갔다.

 

북새통을 이룬 버스가 서부아프리카 관통 해안 하이웨이(Trans-West African Coastal Highway)로 들어섰다. 모리타니 누악쇼트에서 나이지리아 라고스까지 서부아프리카 12개 해안국가를 연결하는 이 하이웨이는 포장도로라 아프리카 도로 치고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다.

# 12개 해안국가를 보면 모리타니, 세네갈, 감비아, 기니비사우, 기니,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코트디부아르, 가나, 토고, 베냉, 나이지리아이다. 아프리카연합(African Union)에 따르면 총 길이 4,560km 3,777km(83%), 아프리카개발은행(ADB)에 따르면 4,010km3,260km가 포장되어 있e. 비포장 구간은 모리타니 누악쇼트-세네갈 다카르 간 약 570km이다.

 

김형, 코트디부아르와 가나에서 활동한 우리 한국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나?”

문형은 가는 곳마다 관심이 많다.

내 지식을 테스트해보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읽고, 듣고, 보고, 알고 있는 범위에서 말해주지. 먼저 두 나라에서 활동한 사람들을 언급하기 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프리카에 진출하게 된 배경과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어. 왜냐하면 그들이 앞장서 씨앗을 뿌렸기 때문에 지금 활동하는 분야와 사람도 있으니까. 예를 든다면 정부파견 의사, 태권도 사범, 한국식당, 가발생산 공장, 사진현상소와 심지어 어업분야까지도.”

정부파견 의사부터 시작해보라고.”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정부가 1968년 니제르와 감비아에 최초로 정부파견의사를 파견했지. 이 사업이 2008년 종료될 때까지 개발도상국가 총 40개에 115명을 파견했다고 해. 아프리카가 26개국 85명으로 가장 많았는데 코트디부아르와 가나에도 몇 명의 의사가 발을 들여놓았지, 코트디부아르에서는 특히 안순구 박사가 유명하더라고. 매스컴에도 올랐지만 책도 펴낼 정도였으니까.”

그 정도 인물이었어?”

“19691월부터 20001월까지 31년 동안이나 코트디부아르에서 의술을 베풀었거든.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 파견의사로 지원한 의사들 가운데는 의무기간 2년을 채운 뒤 다른 선진국가로 이민 가려는 계획을 갖고 있던 그룹과 순수하게 봉사의 뜻을 품고 간 그룹이 있었다는 거야. 그는 자전적 에세이 검은 대륙 의사·추장님에서 이렇게 소회를 적어놓고 있어.”

 

내가 코트디부아르에서 반평생을 살았던 것은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거나 그것을 통해 어떤 명예를 얻고자 해서가 아니었다. 오로지 슈바이처를 본받아,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나보다 못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자 해서였다.(324)

 

내가 그곳 아프리카를 고향처럼 생각하며 정을 붙일 수 있었던 건 하얀 이를 드러내며 티 없이 웃고 있는 원주민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실제로 나는 원주민들을 대할 때마다 어린 시설 읽은 그 책 속의 어린 왕자들을 직접 대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342-343)

 

그런데 1968년이라면 우리나라도 여전히 살기 어려웠고 의사를 해외에 보낼 형편도 되지 않았을 때인데 왜 의사들을 파견하게 됐지?” 문형이 다시 물었다.

우리나라와 북한은 남북이 대치한 상태에서 어느 쪽도 유엔에 가입하지 못한 처지였으니까 아프리카에서 일종의 경쟁관계에 놓여 있었거든. 그러니 유엔 가입국이 되기 위해 아프리카의 유엔 비동맹 가입국가 찬성표를 얻는 것이 얼마나 중요했겠어.”

 

다음 화제로 넘어가지.”

원양어업에 대해서 말하지. 그 전진기지 중 하나가 스페인령 라스팔마스였어. 1966년 라스팔마스에 첫 발을 디딘 우리나라는 80년대 전성기에는 국내 원양어업 18개사의 전진기지에 100여척이 넘는 한국 선적 어선, 그리고 한국인 선원만 1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는 거야. 동화 같은 원양회사는 1973년의 국제 석유 파동을 견디지 못하기도 했지만. 가나에서 아프코(AFKO)라는 회사를 설립해 성공한 김복남씨는 1969년 동화의 주재원으로 가나 땅을 밟았는데 사업체가 철수하는 바람에 76년 낡은 배 두 척으로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고 해. 그 성공신화는 아크라에 가서 자세히 말해줄게. 또 스페인에 기지를 두고 서부아프리카 앞바다에서 조업한 회사에 근무했던 권영호씨는 1979년 폐선 직전의 일본 어선 한 척을 사들여 80년 인터불고(Inter-Burgo)를 설립, 원양어업으로 시작해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야. 내전 중임에도 앙골라에 뛰어들었던 권영호씨의 성공노트가 뭔지 알아?

첫째, 위험이 크면 기회도 많다.

둘째, 믿음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셋째, 얻은 곳에서 씨앗을 뿌려라.

넷째, CEO가 절약하면 회사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

다섯째, 가족처럼 대하면 위기 때 보상받는다.

권회장은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에 쓴 사람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바다는 곧 나의 집이요, 나의 놀이터라고도 말하는 사람이지.

 

또 전관수역이다 뭐다 해서 라스팔마스가 점차 활기를 잃게 됐으니 그 사람들이 어디로 갔겠나. 귀국하거나 전업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모로코 같은 인근 국가로 가 새로운 일터를 마련한 사람들도 있었거든. 라스팔마스와 가까운 아가디르 항에는 수산업에 종사하는 한국인이 적지 않아.”

 

다음 화제로 넘어가지.”

쌍용이 가봉에 세운 유신백화점이라고 들어봤어?”

들어본 것 같은데 내용이 뭐지?”

쌍용이 1976년 한·가봉 합작회사를 세우고 7712월 유신백화점을 열었지만 86년 적자경영을 버틸 수 없어 문 닫은 프로젝트였지.”

사전 시장조사도 하지 않았나?”

하긴 했겠지만 시장을 오판하고 타이밍을 놓친 측면도 있다고 해. 그러나 무엇보다도 비즈니스적인 측면보다 정치외교적인 측면, 즉 남북 대결시대에 봉고 대통령의 환심을 사려는 진출이었으니까 처음부터 위험부담을 안고 있었던 거지. 이름도 소비자에게는 생뚱맞은 유신백화점아닌가.”

그래서?”

쌍용은 망해도 식당 등 그 프로젝트에 따라 갔던 사람은 성공했다는 말이 있었다고. 쌍용의 가봉 진출에 대해서는 가봉 가서 더 자세히 말할게.”

 

다음 화제는?”

사진현상소를 빼놓을 수 없지. 조동순이란 분은 1978년 나이지리아에 가 전 육군참모총장과 군장구류 생산 섬유공장을 차리기도 했지만 군납수요가 1년에 한두 번에 그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전업을 고심하던 중 컬러사진현상소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는 군. 아프리카 사람들이 컬러사진 찍는 걸 좋아하고 컬러필름을 현상하려면 보름이 걸린다는 말에 착안했다는 거야. 그래서 하루만에 현상되는 일본제 기계를 수입해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었는데 83년 군부쿠데타가 터지고 세후 샤가리(Shehu Shagari) 정부(1979.10.1.-1983.12.31.)가 붕괴되자 인근 코트디부아르로 대피했고, 아비장에 다시 타이가상사라는 사진현상소를 열었는데 요새말로 대박을 쳤다는 거야. 상호가 뜻이 깊더라고. 영어 tiger는 호랑이라는 뜻이지만 한자로는 他利加, 즉 타인의 삶을 이롭게 한다는 깊은 뜻이 있다는 거야.”

이름보다 해명이 그럴싸하네.”

어쨌든 타이거상사가 성공을 거두자 아프리카 곳곳에 사진현상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지. 심지어 골목 하나 건너 사진현상소가 있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부르키나파소에서 사진현상소를 운영하는 황옥곤씨의 말에 따르면 80년대 초부터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아프리카에 사진현상소 하나 차려놓으면 돈을 긁어모았다니까.”

 

화제가 또 있어?”

아직도. 그중 하나가 가발생산 공장이야. 1983년 세네갈에 미성상사가 투자하여 비너스 인더스트리란 현지법인을 세웠고, 같은 해 재미 교포가 ‘Senecor-Meches Linda’라는 공장을 세운 거야. 각각 NinaLinda라는 브랜드를 가진 이 두 회사는 그 후 토코, 코트디부아르, 나이지리아, 남아공 등지에 자회사를 세웠지. 다카르 시내에서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수출자유공단에 자리 잡은 비너스 인더스트리의 경우 종업원 600명에 연 매출 1000만 달러인데 70%는 유럽과 미국, 30%는 세네갈에 공급하고 있다고 해. 10여 년 전 어느 자료에서 읽은 거니까 지금은 좀 달라졌겠지.”

그런데 어떻게 아프리카에 가발공장을 세울 생각을 했을까?”

아프리카 사람들은 남녀 불문 심한 곱슬머리지 않아. 그냥 놔두면 둘둘 말리거나 심하면 두피에 파고들어가서 아프기까지 한다고 해. 가발은 보기도 좋지만 그걸 밖으로 잡아당겨주는 역할도 한다는 거야. 그래서 특히 5센티미터 이상 기르기 힘든 여성들에게는 신의 선물이자 생필품으로 여겨진다는 거야. 여기에 착안한 거지.”

 

화제가 무궁무진하네. 또 있어?”

이번에는 태권도로 넘어가보자고. 아프리카 태권도연맹(ATU)19794월 발족하고 양일간 제1회 아프리카 태권도 선수권 대회를 열었는데 11개국에서 선수와 임원 합해 120명이 참가했대. 이 말은 곧 이때 아프리카에 이미 태권도가 적지 않게 보급되었다는 걸 의미한다는 거야. 김상천이란 사람의 박사학위 논문(태권도의 아프리카 주요 국가 진출과 변천 : 이집트, 튀니지, 코트디부아르를 중심으로)에 의하면 1968년부터 1985년까지의 기간을 태권도 진출과 정착, 1986년부터 1997년까지의 기간을 정상궤도 진입, 1998년 이후를 아프리카에의 영향으로 잡았더라고. 또 서성원의 태권도 현대사와 길동무하다에서는 윤사범의 말을 이렇게 빌려 적어놨더라고. 아프리카에는 이집트를 비롯해 남아프리카공화국, 레소토, 탄자니아, 케냐, 가나, 세네갈, 가봉 등 20여개국에서 30여 명의 한인 사범이 활동하고 있다. 케냐에는 400개 도장이 있을 정도로 태권도 저변 확대는 이뤄졌으나 수준은 낮은 편이다. 아프리카에 있는 한인 사범들은 태권도 지도만으로는 생활을 할 수가 없어 생업을 위해 사업을 하거나 다른 부업을 겸해야 한다고.”

태권도는 군인이나 경찰도 배운다면서.”

뿐인가. 정부 고위 관리도 배우기 때문에 인맥을 잘 관리하면 도움을 적지 않게 주지. 내가 알기로는 가봉의 대통령 경호실장은 태권도 교관 출신이라던가? 우리가 이번에 가봉 가면 확인할 수 있겠지.”

 

종합상사가 아프리카에 나간 건 늦지?”

그렇지. 종합상사 제도가 생긴 것이 1975년이었으니까. 코트라(KOTRA)1962년에 탄생했고. 내가 1980년대 초 아프리카에 갈 당시 아프리카 주재 무역관은 꽤 많았어. 다카르(세네갈), 몬로비아(나이로비아), 아비장(코트디부아르), 아크라(가나), 라고스(나이지리아), 두알라(카메룬), 킨샤사(자이르, 현 콩고민주공화국), 나이로비(케냐), 아디스아바바(에티오피아), 카이로(이집트), 트리폴리(리비아), 튀니스(튀니지), 카사블랑카(모로코) .”

아프리카에서 시장이 가장 큰 남아공에는 무역관이 없었나?”

“19676월 개설했다가 789월 폐쇄했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는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과 제도 하에서 소웨토 봉기와 유엔 제제 같은 소용돌이가 있었기 때문이었어. 그러다 1990-1991년 클레르크 대통령이 인종차별적 법률들을 대부분 폐지하게 되어 1992년 재개설하게 되었지.”

그러고 보니 지금 아비장 무역관은 왜 없지?”

정국이 요동치니까 200110월 폐쇄했지.”

 

나와 문형이 이렇게 한국인의 아프리카 진출 제1기 또는 1세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우리가 탄 버스는 인구 17000명의 해안 리조트 타운 아씨니 마피아(Assini-Mafia)를 지나 벌써 국경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국경을 넘는다는 것, 특히 육로로 갈 때는 고생 좀 한다는 말이 머리에서 빙빙 돌아 괜히 육로로 왔는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주사위는 이미 던져진 걸 어떡하랴. 사내 대장부 세 명에 이미 아프리카 물을 마셔본 사람도 있지 않은가. 국경 사무실에서 우리가 직원 앞에 공손히 여권을 내밀자 그는 한국사람이냐고 묻고 도장을 쾅쾅쾅 찍었다. 의외로 쉽게 입국수속을 마치자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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