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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fricaim
제목 D80-12일 코트디부아르의 일탈
작성일자 2016-08-03
조회수 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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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80-12일 코트디부아르의 일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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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어서인지 야무스크로로 가는 왕복 4차선 고속도로에는 차량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양 옆 들판에서 자란 6미터 정도 키의 카카오나무들이 자동차 속도만큼이나 뒤로 밀려났다. 아비장에서 야무스크로까지의 거리는 약 240킬로미터. 서울에서 전주 정도의 거리이기 때문에 서너 시간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 야무스크로에 가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우푸에부아니 대통령의 고향이라는 데 과연 행정수도로 자리잡을 만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지, 또 하나는 로마 성바오로 성당 규모에 버금한다는 바실리카를 구경하기 위해서 였다.

 

문형이 입을 열었다.

코트디부아르를 이해하는 키워드 세 가지 중 두 번째가 우푸에부아니였는데 어떤 대통령이었지?”

성질도 급하구먼. 어떤 답변을 듣고 싶어?” 내 대꾸에 문형은 이렇게 말했다.

아프리카 지도자들 뻔한 거 아냐? 누가 그러던데 일당 독재, 장기 집권, 부패, 쿠데타 4종 세트가 아프리카 지도자들의 공통점이라고.”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 수가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도매금으로 취급하나. 우리가 거쳐왔던 세네갈의 셍고르만 해도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먼저 평화적 정권교체를 했다고.”

극히 예외적인 인물이었겠지.”

그렇기는 해. 하지만 우푸에부아니도 결과적으로 종신 대통령이 되었지만 80년대 초반까지는 국민들로부터 신망 받는 지도자였다고.”

 

펠릭스 우푸에부아니(Félix Houphouët-Boigny)는 야무수크로(Yamoussoukro)의 이전 지명인 은고크로(N'Gokro) 마을에서 19051018일 바울레(Baoulé) 부족 지주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랑스가 코트디부아르를 자국의 서아프리카 식민지의 일부로 선언한 이듬해였다. 의학도였던 우푸에는 의사 조수나 보조로 일할 수는 있었지만, 아프리카인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식민지에서 완전한 개업의가 되는 길은 막혀 있었다. 결국 그는 1930년대에 의학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카카오 농장에서 일하며 족장과 농장주(planter)가 되었다. 그는 곧 식민지 당국에 대항했다. 그에게는 파파 우푸에(Papa Houphouët), 고참(le Vieux), 현자 같은 별명이 있다. 1993127일 사망한 그의 이력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코트디부아르는 1904년부터 1958년까지 프랑스 서아프리카(Afrique-Occidentale française, AOF)로 불리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연맹에 포함되었다.

# 바울레족은 코트디부아르 중부지역에 살고 있는 아칸족의 일파다.

 

독립 이전

우푸에부아니는 반식민주의자·반인종차별주의자로서 1944, 유럽인 농장주들의 횡포에 불만을 품은 아프리카 농민들의 이권을 보호하고, 개선된 노동 조건, 더 높은 임금, 강제 노동 폐지 등을 요구하기 위한 조직인 아프리카 농업 조합 (Syndicat agricole africain, SAA) 을 설립하였다.

1945년 프랑스에서 제4공화국이 출범하자, 식민지 의회 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46년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및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의 정치인들과 결속을 다지고, 아프리카 민주 연합(Rassemblement démocratique africain, RDA)을 창당하여 당 지도자가 되었다. 이때 코트디부아르 지부로 코트디부아르 민주당(Parti démocratique de Côte d’Ivoire, PDCI)을 설립하고 당 지도자가 되어, 코트디부아르의 독립 운동을 주도하였다.

 

독립 이후

우푸에부아니는 코트디부아르 민주당의 일당 독재 체제를 확립하고 정적들을 탄압하는 한편, 프랑스와 긴밀한 친불 정책을 유지하면서 친서방 성향의 정책을 계속해서 펼쳤다.

그는 경제적 중추를 이룬 산업인 카카오의 생산 유통을 관리하고, 카카오 수출 안정화 기금을 마련해 수출 가격을 안정시켰으며, 또 카카오 농장의 개척을 장려해 오트볼타(지금의 부르키나파소), 말리 등 이웃 국가에서 이민을 받아들여 적극적인 생산 확대에 나섰다. 그 결과 1980년대 초까지 코트디부아르의 경제는 이웃 국가들과는 다르게 연평균 8%의 높은 경제 성장률을 보여 코트디부아르의 기적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카카오에 과도하게 의지해 단작(monoculture) 경제화 국가가 된 코트디부아르는, 1980년대 이후 카카오의 과잉 생산으로 경제 기반이 무너지고, 사회 불안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우푸에부아니는 자신의 고향에 막대한 국고를 쏟아부어 새로운 수도 야무수크로를 건설했으나, 바실리크를 비롯한 거대한 건축물이 즐비한 도시에 불과했으며, 수도 기능은 여전히 옛 수도 아비장에 있었다. 요컨대 코트디부아르는 어려운 경제 상황과 더불어 국력이 피폐해 갔던 것이다.

1989119일 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몰타 섬에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냉전시대가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 여파로 냉전의 우산 속에서 일당 독재체제를 구축했던 아프리카에서도 대다수의 나라들이 복수 정당제를 도입하기 시작했고, 코트디부아르 역시 19901028일 복수 정당제에 따른 최초의 대통령 선거가 열렸다. 당시 85세였던 우푸에부아니는 7선에 성공했지만 임기(5) 중인 1993127일 사망하였다.

 

내가 볼 때 우푸에부아니는 결정적으로 세 가지 실책을 저질른 것 같아.”

그게 뭔데?” 문형의 의문에 한형도 궁금한지 나를 쳐다봤다.

첫째는 카카오와 커피 등 단작경제에 너무 매몰되어 공업화를 지연시켰다는 거야. 60-70년대에는 카카오와 커피 등 1차 상품의 국제시세가 좋았거든. 거기서 벌어들인 돈을 공업화하는데 투자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는 거지.”

 

펠릭스 우푸에부아니는 이웃 나라 가나의 크와메 은크루마와는 달리 아프리카의 가난한 신생 독립국이 살아남는 길은 공업화가 아니라 농업의 육성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그중에서도 그는 특히 커피와 카카오 농업 발전에 적극 매달렸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는 게 가장 급선무였다. 그래서 그 지방 토착민이건 이주민이건 가리지 않고 일할 의지만 있다면 땅을 공짜로 내어주는 방식으로 노동력을 끌어들이는 전략을 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오를라 라이언, 초콜릿 탐욕을 팝니다, 51)

 

그래도 코트디부아르의 기적으로 불리기까지 했다면서?”

그게 마취제가 된 거지.”

그건 또 무슨 뜻인가?”

잘 들어보라고. 60-70년대에 뜻밖에 찾아온 경제번영 기간을 코트디부아르의 기적이라고 부르는데, 몇 가지 자극적인 요소들의 혜택을 입은 것도 사실이란 말이야. 우선 일차 원자재 특히 커피와 코트디부아르가 세계 제일의 생산국인 카카오의 국제시세가 무척 좋았거든. 다음으로 프랑스가 아프리카 정책의 진열창을 필요로 했다는 사실이고, 세 번째로는 세쿠 투레(Sékou Touré)가 이끈 기니의 부진, 가나의 정국불안 등 이웃나라들의 안정감 결여가 코트디부아르로 경제활동을 옮겨가도록 했다는 거지.”

그게 전부야?”

또 있어. 선진국에서는 성장이 총체적으로 뚜렷한 때였고, 프랑스령 서부아프리카의 이완을 방지한다는 요소도 작용했지. 코트디부아르의 기적 덕택에 우푸에부아니는 나라 안팎에서 아프리카의 성자라는 이미지를 얻기도 했어.”

 

코트디부아르는 경제기적을 이루었다. 국내총생산은 1950년에서 1980년 사이에 열 배나 늘었고 카카오는 세계 1, 커피는 세계 4, 고무는 아프리카 제1위의 생산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늘도 생겼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남북 간의 격차였다. 인구의 70%가 모여 사는 남쪽에 경제 발전의 혜택이 집중된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바울레(Baoulé), 부르키나파소에서 들어온 외국인들과 토착민 사이의 대립이었다. 게다가 커피, 코코아, 팜유는 국제가격 변동과 일기 조건에 매우 민감한데 1980년대에 들어서자 세계 경기침체와 국내의 극심한 한발로 충격파를 맞아 기 소르망의 표현을 빌리면 초원의 녹색 황금은 납으로 변해 버렸다.’ 무역수지는 적자로 돌아섰고 외채는 대폭 늘어 19875월에는 그 규모가 100억 달러에 달해 상환 불능을 선언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캐럴 오프는 나쁜 초콜릿에서 이렇게도 적었다.

 

생활 조건이 나아질수록 더 빠른 발전을 원하는 욕구가 강해진다고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지적했다고 한다. 민중은 진보의 속도와 범위에 좀체 만족하지 않는다. 우푸에부아니의 경제 기적도 예외는 아니었다. 독립 후 10년 내에 코트디부아르의 국민총생산은 두 배로 늘어났지만 국민은 더 풍족하고 더 빠른 발전을 원했다. 아무리 독재자라 해도 피억압자들을 어느 수준까지는 만족시켜야 하는 데다, 우푸에부아니 경제의 성공은 동기 부여와 사회적 만족이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코트디부아르 국민은 배가 부르긴 했지만 이제는 더 나은 생활을 원했다. 농촌 지역의 땅을 쥐락펴락하는 디울라 부족을 증오했고, 온 도시의 상업을 움직이는 프랑스인을 증오했다.

우푸에부아니의 기적은 이미 신기루가 되었다. 그는 카카오 보조금을 지급하고 대규모 공공사업을 시행해 민심을 잡으려 했다. 일부는 우스꽝스러웠지만 대체로 근사한 공공사업들은 모두 빌린 돈으로 운영되었다.(캐럴 오프, 나쁜 초콜릿, 156)

 

두 번째 실책은?” 문형이 물었다.

수도 이전과 대성당 건설 등으로 국고를 탕진하고 외채를 누적시켰다는 거야. 20년 남짓 집권한 우푸에부아니는 차츰 국민들의 신망을 잃게 된 대신 염증을 사게 되었고 80 전후의 고령으로 판단력도 흐려져 갔다고 봐야지. 왜냐하면 이 거대한 프로젝트가 코트디부아르가 극심한 한발로 경제상황이 악화된 1983년과 맞물려 진행되었고, 카카오 등 일차 원자재의 국제시세도 추락한 시기에 밀어부쳤기 때문이야. 정치적으로 보면 장기집권의 폐해가 드러난 것이라고도 봐야겠지. 어쨌든 우리가 야무수쿠로에 곧 도착할 테니까 그 규모를 잘 보시라고.”

우리가 탄 버스는 11시 반경에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바실리크 앞에 멈춰섰다.

 

우푸에-부아니는 19833월 수도를 아비장에서 북쪽으로 24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그의 고향 마을 야무수크로(Yamoussoukro)로 옮겼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이 우세한 코트디부아르에서(무슬림 39%, 기독교도 33%, 토착신앙 12%) 가톨릭 교도인 우푸에부아니는 1985년부터 1989년 사이에 세계 최대 교회인 야무수크로 평화의 성모마리아 교회당(Basilique Notre-Dame de la Paix de Yamoussoukro)을 지었다. 3억 달러를 쏟아 부어 로마에 있는 베드로 성당을 닮게 지은 이 교회당은 길이 195미터, 150미터, 높이 158미터에 신도를 제단 둘레에 18000(좌석 7,000, 입석 11,000), 회랑 그늘아래 3만 명 등 모두 48000 명 수용할 수 있는 초대형 규모였다.

이 교회는 우푸에 부아니가 교황과 가톨릭 교계에 선사하는 개인적인 선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 안에 교황을 위한 개인 빌라도 같이 지어졌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58월 이곳에 머릿돌을 놓았다고 하는데 오죽했으면 그가 완공 1년 뒤인 1990910일에야 이곳을 찾아 축성식을 주례했을까. 들리는 바에 의하면 우푸에-부아니는 원래 이 성당을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더 크게 지으려고 했는데 교황청이 개입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2센티미터 낮게 지었다고 한다.

이 구조물은 단순한 교회 건축물이 아닌,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대통령의 개인적인 힘과 권한, 그리고 내란과 같은 문제들로 인해 어지러웠던 사회 정치적 배경 안에서 보아야 한다 마크 어빙과 피터 세인트 존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에 적어놓고 있다.

# 바실리카(basilica)란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에 재판소나 집회장, 시장, 관공서, 지붕이 있는 야외극장 등 상업적 용도보다는 공공의 목적으로 사용된 대규모 건물을 지칭한다. 그러나 점차 장방형의 회당이라는 특정 형태를 취한 건축을 지칭하게 되었다.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us , 재위 기간 306-337)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식 인정한 313년 이후에 바실리카는 기독교 의식을 공적으로 치를 수 있는 교회 건물로 사용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는 교회법에 따라 역사가 오래되거나 위대한 성인 또는 역사적 사건 등과 관련되어 국제적으로 예배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는 특정 교회 건물에 바실리카라는 명칭을 부여한다. 이에 따라 바실리카라는 이름이 붙은 교회는 교황과 추기경, 총대주교를 위해 대제단을 보유할 수 있는 권리와 특별사면권 등 특별한 권한을 지닌다.(월간미술, 세계미술용어사전, 월간미술)

 

또한 초콜릿 탐욕을 팝니다의 저자 오를라 라이언은 이런 말도 했다.

 

1989년에 성당이 완공되자, 버스가 관광객들을 가득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성당의 회색 돔 지붕은 몇 마일 밖에서도 보일 정도로 규모가 굉장했다. 에어콘이 빵빵하게 나오는 대성당을 찾은 관람객들은 가이드를 따라 광택이 번질번질하게 흐르는 목재와 반짝이는 대리석 위를 조용조용히 걸어다녔다. 이 사치스런 성당에 대해 부아니 대통령은 순전히 사재를 털어서 건축비용을 댔다고 주장했다. 가이드에게 총 건축비가 얼마였냐고 묻자, 그는 대통령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이렇게 대답했다.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선물은 가격을 매길 수가 없답니다.”

(오를라 라이언, 초콜릿 탐욕을 팝니다, 54)

 

20004월 이곳을 방문했던 짐 로저스는 과연 이 나라의 성 베드로 대성당은 서기 3000년에도 남아있을까? 그때 인류학자들은 이 대성당이 어떤 이유로 지어졌는지 그 의미를 찾기 위해 대성당의 유적이나 찾아볼까?”라고 빈정거렸다.(짐 로저스, 어드벤처 캐피털리스트, 234)

 

문형, 흰 코끼리(white elephant)에 대해 알고 있나?”

희다니? 알비노 코끼리인가?”

그런 말도 있지만 오해고. 태국에서는 흰 코끼리를 창 삼칸(chang samkhan)’이라고 하는데 길조로 여긴대. 태국의 전신인 샴(Siam)은 한때 깃발에 흰 코끼리를 넣었을 정도로.”

그 말을 들으니 불교에서는 흰 코끼리를 신성시한다는 말이 생각나네. 석가모니의 모친 마야부인이 태몽으로 흰 코끼리가 옆구리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라는 면서.”

코끼리에 대해서 제법 귀담아 들은 바가 있구먼. 코끼리라면 할 말이 무궁무진하지만 지금은 흰 코끼리로 국한하고, 정치적 의미를 말하자는 거야.”

뭔데?”

“‘처치 곤란한 물건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거지.”

그거, 아이러니하네.”

옛날 샴에서는 국왕이 불편한 관계에 있는 신하한테 흰 코끼리를 선물했다고 해. 신하 입장에서는 국왕의 선물을 소홀히 하면 어찌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라고. 코끼리가 자연사할 때까지 열과 성을 다해 키울 수밖에 없는데 코끼리가 하루에도 먹어치우는 양이 엄청나단 말이야. 그러니 기둥뿌리가 뽑히고 죽을 맛이었겠지. 이제 이해가 가는가?”

정말 그렇네.”

오늘날에 와서는 이 흰 코끼리라는 말이 용도나 가치가 없는 물건, 계획(scheme), 비즈니스 벤처, 설비 등을 뜻하는 말로 변질되었지.”

# 전설에 따르면, 석가는 도솔천(兜率天)에서 내려와 마야부인에게 흰 코끼리로 현몽하여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내로 들어갔다고 한다. 출산하기 위하여 친정으로 가던 중, 룸비니라는 동산에 이르러 무우수(無憂樹)에 오른팔을 뻗어 나뭇가지를 잡는 순간, 석가가 오른쪽 겨드랑이 밑을 뚫고 탄생하였다고 한다. 마야부인은 석가 출산 후 7일 만에 타계했다고 전해진다.(두산백과)

 

그 구체적인 예의 하나로 코트디부아르의 새로운 수도가 된 전 대통령 우푸에부아니의 고향 야무수크로에는 대통령의 사재 25천만 달러가 투입된 노틀담대성당 주변에 각종 학교와 공공건물들이 프랑스의 부이그(Bouygues)사에 엄청난 이득을 안겨주며 건설되었으나, 그야말로 인적을 찾아보기 힘든 상태에서 방치되어 있음을 들 수 있다. 세네갈에서는 15억 프랑이 투자된 최첨단 화학비료공장(ICS)이 현지인 기술자 양성에 52백만 프랑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비용의 프랑스인 기술자들에 의해 운용되면서 국제시세의 4배에 달하는 비싼 화학비료를 주변지역의 공해문제를 묵살한 채 생산해 내다가 결국 문을 닫기도 했다.(김승민·이복남·한양환, 세계 프랑스어권 지역연구, 169-170)

 

우리는 바실리크 앞에 섰다. 130헥터의 면적에 80만 세제곱미터의 양으로 성토하고 땅 속에 파일을 박아 기초공사를 한 후 그 위에 세워진 바실리카 앞 광장에는 156개의 주랑이 타원형으로 양팔을 벌리고 늘어서서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입이 딱 벌어졌다. 독재의 힘이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우매함이 보였다. 우리는 야무수크로로의 천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감을 했다. 왜냐하면 아비장의 위치가 코트디부아르에서 너무 남쪽으로 치우쳐 있는데다 인구가 급증하고(아비장 인구 197585만 명, 1985172만 명) 일부 지역은 슬럼화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2014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코트디부아르의 인구는 2,270만 명, 아비장 인구는 470만 명으로 아비장이 전체 인구의 약 20% 차지했다.

 

그렇다면 우푸에부아니의 세 번째 실책은 뭐지?”

문형은 실물을 본 후 두 번째 실책도 인정하는 듯 했다.

“30년 넘게 장기집권을 하면서 후계자를 키우지 않았다는 거야. 달리 생각하면 후계자는 장기집권에 걸림돌이 된다고 여겼겠지.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없다는 말도 있고,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말도 있으니까.”

후계자가 없더라도 정치만 잘 하면 되질 않나?”

문제는 고령화로 판단력이 흐려지고, 급서할 경우 정국이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갈 확률이 매우 높다는 거야.”

지구상에는 그런 사례가 적지 않지. 국민들의 호응 속에 무대에 등장해서 중반전까지 잘 하다가 후반전에 죽을 쑤거나 나라까지 망치는.”

그래서 입장보다 퇴장이 더 중요하다는 거야. 박수 받을 때 떠나라는 말도 있잖아.”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위기 역시 누가 국가 수장으로서 우푸에부아니의 뒤를 이을 것인가가 이슈로 등장했다. 그가 1980년 그의 이전의 정치적 상속자인 필립 야쎄(Philippe Yacé)와의 관계를 단절한 후 야쎄는 만일 국가 수장이 업무를 수행할 수 없거나 궐위할 경우 국회의장으로서 코트디부아르 대통령의 기능을 충분히 수행할 자격이 있었다 - 우푸에부아니는 후계자의 공식적인 지명을 그가 할 수 있는 한 뒤로 미뤘다.

대통령의 건강이 날로 쇠약해지고 프랑스에서의 입원치료가 거듭되자 그의 잠재적인 후계자들 간에 탐욕의 불이 붙었고 1990년 이후부터 알라싼 우아타라(Alassane Ouattara) 수상이 국사를 돌보았다. 그리고 권력투쟁이 일어났는데 우푸에부아니는 우아타라를 내치고 국회의장인 베디에(Henri Konan Bédié)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권력투쟁의 막이 내렸다.

199312월 우푸에부아니는 전립선암을 앓다가 코트디부아르로 급히 귀국했다. 그의 상속에 관한 마지막 의향을 확인하기 위해 수명 유지장치를 계속 부착했고 가족 동의를 받은 후인 127일 장치를 떼어냈다. 우푸에부아니는 코트디부아르를 위해 어떤 서면 의향이나 유언장도 남기지 않았다. 그가 인정한 상속자들 특히 헬레나는 우푸에부아니가 남긴 막대한 재산의 일부를 회수하기 위해 정부를 상대로 투쟁하면서 사유 재산은 국가에 귀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우푸에부아니와 같은 바울레족 출신인 앙리 코낭 베디에가 정권을 이어받았지만 경제난으로 인해 정권 유지가 쉽지 않자 베디에는 코트디부아르인(ivoirité)이라는 정체성을 내세우고 국민통합 대신 국민 분열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리기 시작했다. 위기 국면을 돌파하고 대중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30% 정도의 외국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아울러 대통령 선거법을 개정하여 후보의 양친이 코트디브아르에서 태어났고 후보는 선거 전 5년 동안 코트디부아르에 거주했어야 한다는 요건을 내세웠다. 알라싼 우아타라를 겨냥한 개정이었다. 우아타라의 부친에게는 부르키나파소의 피가 있다는 소문이 있었고, 우아타라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근무하느라 1990년 이후 미국에 거주했었기 때문이다. 베디에는 우푸에부아니 정부 시절 수상(1990.11-1993.12)까지 지낸 우아타라를 국적이 불분명한’, ‘외국인으로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결국 두 사람의 대립으로 인해 국가 전체가 우아타라 파와 베디에 파로 분열하게 되었고, 코트디부아르 사람과 부르키나파소 사람 사이의 대립도 격화되었다.

이처럼 국가 분열의 위기에 처한 코트디부아르에 쿠데타가 발발한 것은 19991224일이었다. 코트디부아르 사상 최초의 쿠데타를 주도한 사람은 구에이(Robert Guéï) 장군으로, 그는 불만을 품은 군부세력의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쿠데타도 갈등을 종식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새로 헌법을 개정하고 난 후에 치른 2000년 대선에서, 우아타라가 아닌 로랑 그바그보(Laurent Gbagbo)가 선출된 것이다. 그바그보는 초대 대통령 우푸에부아니의 정적이었다. 국민 분열의 기제로 만들어낸 코트디부아르인이라는 정체성이 거꾸로 민족 간 갈등에 도화선이 된 것도 코트디부아르로서는 불행한 일이었다. 선거를 치르고 나서도 갈등의 골은 깊어졌고 남북 간의 분열은 치유되지 않았다.(장 크리스토프 빅토르, 아틀라스 세계는 지금, 191-193)

 

2002919일 해고당한 군인들이 또 쿠데타를 기도했다. 1차 내전의 신호탄이었다. 반란군은 남부의 아비장, 중부에 있는 제2 도시 부아케(Bouake), 북중부 산악지역에 있는 인구 17만 명의 코르호고(Korhogo)를 장악하려 했다. 반란은 아비장에서는 실패했지만 다른 두 곳에서는 성공해 상황이 순식간에 남부를 장악한 정부군과 북부를 쥔 반군 간의 내전으로 발전했다., 전투를 몇 개월 치른 후 평화협정에 이르렀고 프랑스 평화유지군이 휴전선을 순찰하기 위해 도착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200411월에 그바그보가 반군에 대한 공습을 명령했고 116일 부아케에서의 공습에서 프랑스 군인들이 다치고 9명이 사망하고 34명이 부상당한 사건이 터졌다. 코트디부아르 정부는 오폭이라고 해명했지만 프랑스는 계획적이라고 주장했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즉각 코트디부아르 공군 전투기 2대와 헬기 5대를 파괴하도록 지시하는 등 보복행위를 취했고, 주민들의 반()프랑스 소요가 이어졌다. 1110일에서 15일까지 닷새 동안 모두 13만여 명의 프랑스 주민들 가운데 5천여 명이 급하게 귀국하는 사태를 빚으며 코트디부아르는 내전뿐 아니라 프랑스 관계에서도 초긴장 상태를 자아냈다. 프랑스와 코트디부아르 간의 공고한 유대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는 징후였다. 1차 내전은 200734일 막을 내렸다. 그리고 약 39개월 후 2차 내전(2010.11.28.-2011.4.11.)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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