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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fricaim
제목 D80-10일 말리에 아쉬움을 남기면서
작성일자 2016-07-01
조회수 334
추천수 0
 

D80-10일 말리에 아쉬움을 남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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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마코로 돌아온 우리는 묵었던 호텔로 가 다른 방을 배정받은 후 다음날 떠날 비행기 편 예약을 한 번 더 확인하려고 에어코트디부아르 항공사 사무실을 찾았다. 기우이겠지만 내가 2000년대 초 코트디부아르에 출장 갔을 때 아비장-카사블랑카 행 비행기편 예약을 서울에서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좌석이 없다는 황당한 말을 들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쁘장한 여직원이 빠드프로플렘(Pas de probleme)’이라며 눈을 찡긋했다.

밖으로 나오자 뜨거운 열기가 온몸을 나른하게 했고, 문형은 길을 걸으며 연신 땀을 닦았다. 갈증이 났다. 저녁식사도 가까워서 안주감이 푸짐한 맥주 집을 찾기로 했는데, 마침 치킨을 파는 집이 보여 그곳 야외에 자리를 잡았다. 돌이켜 생각하니 우리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넌 후 아프리카 땅에서 10여일밖에 지내지 않았지만 한 달은 보낸 것 같았다. 모로코, 세네갈, 말리에서의 여정이 새삼스러웠다.

 

강행군 했어도 아직 낙오자 없이 잘 버티고 있지요?”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강행군 하니까 오히려 독이 올라 무사한 것 같습니다.” 과묵한 한형의 말이었다.

문형이 한 마디 보탰다.

아프리카가 김형과 우리를 알아 모시는 거겠지.”

그런데 우리가 평소 알고 있는 아프리카와는 너무나 딴 판인 것 같지 않아요? 정글도 동물도 없고. 기대에 어긋났으니 재미도 없었을 것이고.” 내가 미리 예방주사를 놓았다.

그래도 아주 좋은 경험인 것 같아요.” 한형이 화답했다.

문형은 어느 곳이 가장 인상적이었어?” 내가 문형을 보며 묻자

모로코의 페스와 마라케시, 세네갈의 고레섬, 말리의 팀북투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내가 말을 이었다.

젠네와 반디아가라를 못 가본 게 아쉽기는 해. 하지만 노예무역, 탐험, 투아레그족과 도곤족 등 역사와 종족과 문화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지 않았나. 카사블랑카처럼 기대에 어긋난 곳도 있었지만.”

렌터카로 모로코의 아틀라스 산맥 사이를 달리고, 경비행기로 니제르 강 위를 날은 것도 좋은 추억거리가 되겠지요.” 한형이 말을 받았다.

그래도 지금은 KBS, EBS, SBS, MBCT-채널 등이 브라운관을 통해 아프리카를 많이 보여주고 있어 시청자들이 쉽게 아프리카에 다가가고 있는 편입니다. 게다가 김중만, 전화식, 김용범 같은 사진작가들도 아프리카를 카메라에 담아 전하고 있고요.”

김중만은 어디서 들은 이름 같은데...”

나는 제주도에 갔을 때 아프리카박물관에서 그의 작품을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 맞아! 김중만씨갑자기 생각난 듯 이름을 불렀다.

맞아. 열정이 넘치는 국제적인 사진작가지. 나는 2009년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김중만의 아프리카 기행에서도 본 적이 있어. 1부가 아버지의 땅 아프리카였지.”

아버지의 땅 아프리카라니?”

그럴 이유가 있어. 김중만이 간 무대는 부르키나파소가 아니라 우리가 방문한 이곳 말리였지만.”

 

김중만. 강원도 철원에서 1954년 출생한 그는 1971년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부르키나파소로 이주했다. 아버지 김 정 박사는 정부 파견 의사였다. 정부 파견 의사란 대한민국 정부가 해외협력사업의 하나로 1968년부터 2008년까지 40년 동안 의료 환경이 매우 열악한 개발도상국의 오지에 국비로 파견하여 의료 활동을 하였던 의사다. 19689월 감비아와 니제르에 최초로 의료단원을 파견하면서 시작된 이 사업으로 총 40개 개발도상국에 115명의 의사가 참가하였는데 이중 아프리카가 26개국에 85명이었다. 이들의 진료활동은 인력 부족뿐만 아니라 의료장비도 허술했기 때문에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현지 교육환경이 열악하여 1974년 프랑스로 유학을 간 김중만은 니스 국립응용미술대학과 니스 국립장식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던 중 사진작가로 변신해 1977프랑스 오늘의 사진에 최연소 작가로 선정된 인물이다. 그는 고국에서 두 번 추방당하기도 했는데, 1차 추방(1985)은 프랑스 국적자가 사전 신고나 당국의 허락 없이 전시를 열었다는 이유로, 2차 추방(1986)은 신상옥 감독의 전 부인인 배우 오수미와 살고 있었는데 신감독이 북한을 탈출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했다고 한다.(1988년 한국 국적 회복) 그가 지금까지 찍은 50만 장 이상의 사진 중에는 아프리카 여정, 아프리카 아프리카등의 책자를 통해 독자들과 만난 작품도 있고, 제주도의 아프리카박물관에 전시된 작품도 있다. 그런가 하면 2014년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그의 국토와 조국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은 독도 사진전시회도 열었다. 한편 1999년 사망한 김 정 박사는 본인의 뜻에 따라 시신을 아프리카와 고향에 나눠 묻었다고 한다.

 

그건 그렇고 김형, 말리 경제는 어떻게 될 것 같아? 희망이 없는 것 같아서 말야.”

문형의 질문에 참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섣불리 대답했다가는 명색이 아프리카 전문가라는 사람이 망신당하기 딱 좋은 주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프랑스와 중국이 말리에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 지로 답변을 대신하려고 했다. 만일 이 두 나라가 말리와 우호관계를 증진하면서 적극적인 협력관계를 추진하고 있다면 이는 말리가 적어도 시장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방증이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말리 경제는 농업에 기반을 두고 있고, 농민들 대다수가 쌀, 땅콩, 사탕수수, 면화 등 현금작물과 생계농업에 매달리고 있어. 가장 생산적인 농업분야는 니제르 강변, 말리 내 니제르 삼각주, 시카쏘(Sikasso) 주변 남서부 지역을 따라 형성되어 있지. 광물자원으로 인광석, , 우라늄 등이 매장되어 있다고 하나 중간 규모의 금 산업을 제외하면 천연자원 측면에서는 내세울 것이 거의 없는 나라고, 수산업도 그저 그런 상태인 것 같애. 공업은 섬유업과 식품가공 정도라고나 할까.” 나는 이렇게 경제개황 설명으로 생각을 가다듬을 시간을 갖은 후 프랑스와 중국의 진출 현황을 피력했다.

그러니까 전망이 밝다는 거야 어둡다는 거야?” 문형이 성질 급하게 다그쳤다.

앞서 언급했듯이 프랑스는 말리 내전에 개입할 만큼 지금도 말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게다가 식민통치시대에 뿌려놓은 씨앗들이 아직도 건재하지. 직물공장처럼.”

나는 에릭 오르세나가 쓴 코튼 로드를 읽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목화를 예로 들었다. 그 책의 몇 대목을 인용한다.

 

아프리카에서 목화 재배는 아주아주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세기를 거듭하면서 그 전통은 지속되어 왔다. 마을에서는 필요한 옷을 만들기 위해 목화를 심었다. 그러다가 식민지 역사가 이 평화스러움을 모두 망쳐버렸다. 프랑스의 공장들은 원료를 필요로 했다. 식민지 행정기관에서 이른바 노동 반장이라고 불리는 작업 반장들을 주축으로 하여 원주민 예측 회사를 설립했다. 이름은 그럴듯하지만 그 이름하에 진행되는 일은 끔찍했다. 농부들은 언제나 많은 목화, 좀 더 많은 목화를 생산해야 했다. 덕분에 가죽 끈(물소나 하마의 가죽)을 매듭지어서 만든 채찍은 한시도 이들 작업 반장의 손을 떠나지 않았다.

1950년대 초에 들어와 이 같은 혹독한 작업 조건은 약간 인간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섬유 야심은 변하지 않았다. 이 무렵 회사가 하나 태어났다. 공공부문에서 자금을 대는 회사였다. 이 회사는 목화에 대한 모든 에너지를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해 만들어진 회사였다.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을 했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프랑스 섬유개발회사(CFDT)에서 말리 섬유개발회사(CMDT)로 이름만 바뀌었기 때문이다. 자본금은 내내 공공부문에 속했다(프랑스 정부 40%, 말리 정부 60%). (에릭 오르세나, 코튼 로드, 26-27)

 

바마코 동쪽에 있는 쿠티알라(Koutiala)의 인구는 14만 명. 말리 목화생산의 심장부이자 섬유개발회사(CMDT) 등을 품고 있는 제 2의 공업도시이다. 목화 때문에 사람들은 때로는 쿠티알라를 백색황금 수도라고 부른다. 밤낮없이 일주일 내내 가동되는 여섯 개의 공장 중 네 개는 CMDT에 속한다. 끊이지 않는 트럭의 행렬이 공장에 목화를 실어다 주면 일꾼들은 잠수 안경과 코와 입까지도 가리는 큼지막한 마스크를 쓰고 일한다. 휴식시간이라고는 전혀 없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게으르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면 반드시 쿠티알라에 와서 13교대 근무를 해 봐야 한다고 말할 정도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 스태그플레이션에 의해 영향을 받아왔다. 코튼 로드의 저자 에릭 오르세나에 의하면 아마두 투마니 투레 대통령(재임기간 2002.6.8.-2012.3.22.)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목화는 우리나라 수출액의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목화는 직접적으로 우리나라 인구의 3분의 1가량을 먹여 살립니다. 무려 350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목화를 생업으로 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웃 나라에서는 아마도 목화 관련 종사자가 1,500만 명 정도 될 겁니다! 물론 나는 농민들에게 세계 시장 가격보다 비싼 목화 수매가를 보장했습니다. 나한테 그것 말고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농민들은 모두 들고 일어났을 겁니다! 이게 바로 세계은행이 추구하는 정책입니다.”(에릭 오르세나, 코튼 로드, 48)

 

그는 또 IMF와 세계은행이 요구한 구조조정프로그램과 관련해 이런 말도 했다.

 

민영화? 그런 거 다 좋습니다. 어쨌거나 우리한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세계은행이 지나치게 서두르는 나머지 우리 목화산업 전체를 그르치게 만드는 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따금씩 그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혹시 우리나라 목화산업 전체를 뿌리 뽑아 버리는 게 그자들의 목적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경쟁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에릭 오르세나, 코튼 로드, 50)

 

에릭 오르세나는 코튼 로드에서 중고의류가 말리의 섬유산업을 망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장에서 나는 중고의류들을 보았다. 산더미처럼 쌓인 의류들. 트럭들은 계속 길바닥에 의류를 쏟아 놓는다. 하품 중에서도 최하품들이다. 그리고 이들 상당수의 바지, 스커트, 원피스, 티셔츠 등은 최하품보다도 더 싼 옷들이다. 중고품이기 때문이다. 일단의 재봉사들이 이들 중고의류를 가져다가 약간 손질해서 새로운 기분이 나도록 수선한다. 가위로 허리 부분의 다 늘어난 고무 밴드를 떼어내고 대신 자동차 타이어 고무를 잘라 박은 속옷도 눈에 띈다. 나는 이 의류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물었다. 내 질문에 사람들은 콧방귀를 뀐다.

그걸 누가 알겠소?”

찬찬히 잘 살펴보니 자선단체의 기부물품이 상점의 진열대에 버젓하게 전시되어 있기도 하다. 본의 아니게 농업 종사자들과 경쟁관계에 놓이게 되는 식량원조가 미래의 기근이라는 고질을 배태하고 있듯이, 의류 기증 역시 지역 생산 경제를 망친다. 북구 지역 자선단체들과의 교묘한 공모를 통해서 중국 의류산업은 말리에 섬유업이 태동될 수 있는 씨를 말렸다.(에릭 오르세나, 코튼 로드, 54)

 

문형이 물었다. “중국 진출은 없나?”

아프리카를 융단폭격하고 있는 중국이 말리라고 그냥 지나치겠어?”

구체적으로 보면?” 한 발 더 들어간다.

지난 2000년부터 2012년까지 중국은 말리에서 20여개의 대형 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그 가운데는 15,400만 달러 상당의 차관을 제공한 바마코-세구 간 고속도로도 들어있지. 뿐만 아니라 니제르 강을 가로지르는 우정의 다리라든지, 대형 신축 병원, 국회의사당 본청, 새 경기장, 북부의 설탕공장 두 곳, 세구에 위치한 섬유공장 등이 있다고 해.”

중국이 고도로 가시적인 성과를 낼만한 사업에만 집중적으로 하드웨어를 쏟아 붓는 구먼.”

인프라는 정부의 우선순위를 반영하니까. 니제르 삼각주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인다더군. 언젠가 세계의 곡물 가격이 뛰기 시작하면 미개발의 니제르 삼각주야말로 거대한 잠재 가능성을 지닌 세계의 몇 안 되는 지역으로 각광받을 거라나.”

 

아프리카, 중국의 두 번째 대륙의 저자 하워드 프렌치는 말리 출신의 전설적인 인간 팰러리 불리와 깊은 대화를 나눈 후 이렇게 썼다. 우리가 귀담아 들을만한 대목이라 옮겨 적는다.

 

중국이 말리에 진출한 지 오래 되었지만 언제나 신속하게 성과를 내거나 단기에 수익을 거두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섬유, 설탕, 담배와 같이 중국인들이 오래전에 투자한 분야를 열거하면서 대부분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거나 심지어 완전히 투자금액을 손해보기도 했다고 전했다. “중국은 일을 하는 방식이 서양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보아뱀 같다고나 할까요. 먹잇감을 조용히 관찰하고 시간을 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중국인들은 장기적으로 수익을 내기 위해 기다리고 있어요. 최상의 결과를 낼 때까지 기다리는 겁니다.”(하워드 프렌치, 아프리카, 중국의 두 번째 대륙, 248-249)

 

화제를 부르키나파소로 옮겼다. 우리가 앞으로 방문하게 될 코트디부아르와 가나는 정치경제적으로 부르키나파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문형과 한형, 부르키나파소라고 들어봤습니까?”

말리 바로 아래에 있는 나라지 않아.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고.” 문형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1896년에 프랑스의 보호령이 된 이 나라는 한때 오트볼타라고 불렸지. 여섯 나라에 둘러싸인 내륙국가로 면적은 274,200제곱킬로미터에 수도는 와가두구고.”

 

오트볼타(Haute-Volta, 영어로는 Upper-Volta)198484정직한 사람들의 나라라는 뜻인 부르키나파소로 국명을 바꿨다. 1년 전인 198384일 나이 33세에 권력을 장악한 토마 상카라(Thomas Sankara)가 취한 조치였다. 마르크스 혁명가, 범아프리카주의 이론가,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로 불리는 상카라는 장기, 독재, 부패로 얼룩진 아프리카 정치판에서 돋보이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다음은 그의 약력이다.

1981년에 서른 살의 나이로 정보부 차관에 임명된 그는 각료 회의에 처음으로 참가하면서 자전거를 타고 갔고, 반년이 지난 후 넌더리가 나서 정부의 일을 그만두었다. ‘정부가 국민을 속박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 후 정국이 소용돌이치자 새로운 군사 권력자는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빈곤층에서 인기가 있던 상카라를 19831월 잠깐 동안 총리로 임명했지만 5월에 해임하고 가택에 연금했다. 그러자 토마 상카라를 지지하는 항의 시위가 이어졌고, 8월 초에 그의 친구인 블레즈 콩파오레가 리비아의 후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키고 상카라를 부르키나파소의 새 대통령으로 임명하였다. 부정부패와 프랑스 식민잔재 청산을 쿠데타의 명분으로 내걸었다.

상카라는 과중한 인두세 폐지, 과감한 토지 재분배정책 등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을 펼치는 한편 250만 명의 어린이들에게 예방접종을 이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하고, 사막화를 막기 위해 1000만 그루의 나무를 심고, 일부다처제와 할례 의식을 금지하는 등 여러 분야의 개혁도 단행하였다. 하지만 상카라의 개혁정책은 자국에서도 개혁세력들이 들고 일어날 것을 우려한 주변국 독재자들과 아프리카 대륙에 사회주의 개혁을 퍼뜨릴 것을 우려한 미국 등 서방국가에도 위협적으로 비쳤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공유할 수 없다고 했던가. 상카라의 혁명 동지요 정치적 동료였던 블레즈 콩파오레는 미국의 지원을 업고 19871015일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상카라를 살해하고 대통령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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